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문단 편집) == 여담 == 총 55편의 논문과 13권의 학술서적, 15권의 일반교재를 서술하였다. 특이하게도 그가 제출한 논문은 모두 프랑스에서 출간하는 저널에서만 출간되었으며, 모두 [[프랑스어]]로 기술되었다. 그로텐디크는 적지 않은 수의 책을 저술했는데, 그 두께가 상상을 초월한다. 대표적인 저술서는 Eléments de géométrie algébrique(EGA), Séminaire de géométrie algébrique(SGA) 로 대수기하 전공자들에게 경전으로 꼽히며, [[니콜라 부르바키]]의 원론 시리즈와 함께 수학자들에게 프랑스어 학습을 강요하는 원흉으로 꼽히기도 한다. 다만 저술 및 강연 활동에 썼으나 2차대전기 유대인 수용소에서나 겨우 익히기 시작했기에 원어민들보다는 서툴 수밖에 없던 프랑스어가 아닌 [[독일어]]가 모어였기 때문에 수기로 작성한 기록 및 메모는 프랑스어 못지 않게 독일어로도 많이 남았으며, K-theory처럼 그로텐디크가 독일어를 바탕으로 용어를 정해놓은 것이 그대로 분과 학문의 이름으로 굳어져버린 예도 있다. 이외에 미국, 캐나다, 브라질 등 수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프랑스어 외에 영어로도 많은 강의를 했는데, 강의를 하기에 무리가 없을만큼 유창하면서도 프랑스어와 독일어의 영향이 억양과 발음에서 많이 묻어난다. 프랑스어로 쓰인 대부분의 저술 작업도 본인이 혼자 다 한 것은 아니고 부르바키 창립멤버이자 문서 작업 전담자이자 IHES 창립에도 도움을 줬던 22살 연상의 돈 많은 선배 장 디외도네에게 도움을 받았다. 수학자였지만 1960년대 후반에는 생물학, 물리학에도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주로 [[리처드 파인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암산에 능하지 못했다고 하며 펜과 종이가 없으면 사고가 되지 않아서 늘 펜으로 적어가며 생각해야 연구가 진행되는 버릇이 있었다. 암산에 서툴러 생긴 가장 대표적인 [[흑역사]]로 [[57]] 사건이 있다. 강연에서 "소수의 예를 들어보자"면서 들먹인 것이 57이라는 3의 배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격뿜했고, 57에는 그로텐디크 소수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헌데 57 같은 흑역사에도 불구하고 컴퓨터는커녕 그 흔한 쌀집계산기조차 안 쓰는 순도 100% 아날로그형 인간(?)이었는지 나이 들어서는 남프랑스의 산동네에 은거한 자신을 찾아온 제자가 연구 이야기를 하다 계산 따위는 컴퓨터로 후딱 해버리면 된다 말하자 컴퓨터 같은 요사스러운 물건 자기는 평생 안 쓴다고 짜증을 냈다는 썰도 있다. 그나마 평생 손글씨만 쓴 건 아니어서 오래된 타이프라이터 정도는 잘 썼다고.[* 20세기 후반부터는 컴퓨터과학의 발전이 수학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지만, 프로그래밍이나 인공지능 같은 것을 알아봤자 써먹을 방법이 없는 (어떤 면에서는 '''써먹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연구분야가 현대수학에는 여전히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컴퓨터의 도움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학자들이 여전히 많이 있다. 하지만 그로텐디크의 경우는 연구 분야의 특성은 둘째치고 아나키스트, 생태주의자로서 '사상적으로' 컴퓨터라는 물건 자체를 거부했다는 점이 문제다. 같은 해에 필즈상을 받은 [[마이클 아티야]]의 삶과 대조되는데, 아티야는 (주 연구 분야가 수리물리 쪽으로 뻗어나간 점도 있지만) 그로텐디크만큼 좌파인 인물도 아니었고 너무 모난 성격이지도 않아 학계 커리어도 꾸준히 이어간 인물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후배들의 존경을 받으며 열정적인 연구활동을 이어갔다. ] 2017년 몽펠리에 대학에서는 그로텐디크가 생전에 작성한 18,000쪽 이상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자필 노트를 온라인으로 전면 공개했다. 프랑스어, 독일어, 드물게 영어까지 뒤죽박죽으로 혼재되어 있으며 엽서, 쪽지, 이면지에까지 아무렇게나 선을 박박 긋고는 아무도 못 알아볼 일필휘지의 고약한 필기체로 써갈기는등 그로텐디크의 별난 성격이 많이 묻어나있어 언어의 장벽과 손글씨의 압박을 견뎌낼 수 있거든 찾아보기를 권한다. [[https://grothendieck.umontpellier.fr/|###]] 한편으로는 전형적인 야행성 연구가여서 오전에 푹 자고 밤에 일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눈만 감으면 바로 잠에 빠져들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한창 연구에 매진할 때에는 길바닥이나 방바닥을 가리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자고 싶으면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유대인 수용소에서 [[복싱]]을 배웠으며 평생 복싱을 연마했다. 이 실력으로 교수 신분일 때 경찰관 2명을 때려눕혔던 전력도 있다. [[니콜라 부르바키]]의 리더 격이었던 [[앙드레 베유]]는 그로텐디크를 미친듯이 질투했다. 베유 같이 자존심 높은 명문대 출신 [[금수저]]에게는 프랑스어도 서툰 (어디까지나 베유 같은 엘리트주의자의 기준에서) [[지잡대]] 출신의 이름없는 허접한 애송이가 수학계를 선도하던 위대한 선배들을 마구 까며 부르바키를 뒤집어놓았으니 도저히 곱게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나 의외로 [[장피에르 세르]]는 그로텐디크보다 앙드레 베유를 더 높이 평가한다. 그로텐디크는 [[범주론]]을 원론에서 왜 안 써먹냐는 [[키배]]를 벌이다 부르바키의 3세대 멤버들 중 유달리 일찍 탈퇴하고 상당기간을 부르바키까로 지냈다. 그래도 제자들에게 부르바키에 대해 악담만 한 건 아니었는지 그로텐디크의 몇몇 제자들은 훗날 부르바키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로텐디크의 놀라운 점은 만개했다는 현대의 수학에서 스킴, 에탈 코호몰로지, 모티브 등 난해하면서도 보편적인 개념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불가사의함이다. 그로텐디크의 업적은 그 현란한 추상적 접근방식과 그 추상적인 아이디어들을 엄밀하게 표현하는 그의 완벽주의 정신의 결정체로 유명하다. 또 한편으로 그로텐디크와 같은 시기에 대수기하학을 연구했던 Pierre Cartier에 의하면, 그로텐디크는 문제 해결사(problem solver) 타입의 수학자는 아니었다고 한다. 오히려 그로텐디크는 창조자에 가까웠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천재 수학자라는 점에서 [[존 폰 노이만]]과도 종종 비교되기도 하는데, 사실 이 두 사람은 분야도 다를 뿐더러 활동시기와 연구 배경도 달라서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 폰 노이만이 순수수학, 응용수학, 컴퓨터공학 등 다방면에 걸쳐 업적을 남긴 천재라면 그로텐디크는 순수수학의 한 분야인 [[대수기하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은 수학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 수학에 끼친 영향력에 있어서는 그로텐디크가 더 높은 평가를 받고, 팔방미인으로서의 다채로운 면모는 폰 노이만이 더 높이 평가받는다. 재밌게도 이 두명은 많은 부분에서 대조되기도 하는데 각각 미국과 프랑스에서 활동했으며, 두 명 모두 유대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가정적 배경[* 폰 노이만은 이름에서부터 명문가 귀족 도련님임을 알 수 있으나, 그로텐디크는 부모가 모두 혁명의 혼에 불타오르며 가정 생계를 등한시하던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란 흙수저 출신이었다. ], 정치성향[* 폰 노이만은 극렬 반공주의자로서 소련에의 선제타격에도 찬동한 우익 인사였으나, 그로텐디크는 극좌 성향의 반전주의자이자 생태주의적 아나키스트였다.], 연구의 방향성[* 그로텐디크는 [[장피에르 세르]] 등과 함께 순수 수학의 추상화에 엄청나게 기여하였고, [[대수기하학]]을 현대 수학의 가장 중요한 분야로 발전시키는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그 반작용으로 수학이 현실과의 괴리가 심화되어서 물리적 실체가 없는 수학은 공허한 이론일 뿐이라는 비판까지 수학계에서 나오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폰 노이만은 수학이 보다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니콜라 부르바키]]가 주도하던 현대수학의 추상화를 언짢아했다. 사실 이는 수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활발히 논쟁되는 문제로, 관심 있는 사람은 인터넷에서 아르놀트-[[장피에르 세르|세르]] 논쟁을 찾아보길 바란다. ]에서는 정반대였다. 여담으로 폰 노이만은 종교에 회의적이었지만 그로센딕은 말년에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여기까지 읽어봤다면 느끼겠지만 정말 영화같은 삶을 살았다. 어린 나이에 여권도, 부모도 없이 함부르크에서 홀몸으로 기차에 올라 말도 안 통하는 프랑스로 도망쳐 나온 일,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서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스스로 사고하는 법을 익히며 고통스러웠던 시절을 인생의 분기점으로 만든 일, 공교육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했지만 수학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고 다른 엘리트 수학자들을 따라잡기 위해 공부했던 일, 늦은 나이에 대수기하로 전공을 바꿔서 마침내 그 분야의 입지전적인 위치에 올랐으나 스스로 학계를 떠나 반전운동과 사회환경운동에 뛰어들었던 일, 이후 사회와의 접점을 끊고 은둔하며 지낸 일화 등. 그러나 업적에 비해서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편은 아니다. 사회적 차별, 안타까운 개인사, 역사의 파도를 뚫고 위대한 업적을 남긴 과학자로 자주 거론되는 [[마리 퀴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존 폰 노이만]], [[앨런 튜링]], [[스티븐 호킹]] 등에 못지 않은 흥미진진한 서사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그 서사를 비전공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할 수 없을만큼 매우 높은 학술적 진입장벽 탓에 일반인들을 위한 스토리텔링의 소재로는 별 인상을 남길 수 없어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는 흔한 어린이용 위인전에서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20세기 과학사에 대한 소개는 공교육을 이수하는 중고교생 수준의 독자 및 시청자를 대상으로도 서사를 잘 파악할 수 있게끔 대중서나 영상 다큐멘터리 등을 짜낼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수준으로 19~20세기의 수학사를 다루기 위해서는, 컨텐츠를 접하는 독자 및 시청자에게도 19~20세기 수학자들이 개척해온 지적 영역을 전공서적으로 확인해본 수학과 학~석사 수준의 수학적 경험이 갖춰져 있어야만 서사를 서사답게 소개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이 갖춰져있지 않은 비전공자들에게는, 르베그 적분론을 아무 책도 안 보고 혼자만의 사고로 정의해냈다는 외톨이 고등학생의 일화보다 초등학교 때 이미 미적분 계산을 했다는 흔한(?) 영재의 이야기가 더 실감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 그가 한창 연구에 전념하던 1950~1960년대에 그는 본인의 연구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연구의 방향을 잡는 데도 능숙했다고 한다. 한창 때 워낙 영향력이 컸고 [[존 내시]]가 정신분열증으로 방황했던 어느 한 시기에도 그로텐디크라는 이름을 여러 번 거론했다고 한다. 사실 그로텐디크가 존 내시 내외에 굉장한 호감이 있었다고 한다. 은퇴 후 한국에 비공식적으로 몇 번 방문했으며, IHES에서 그로텐디크를 사사한 적이 있는 [[히로나카 헤이스케]] 교수가 서울대에서 강연할 때 같이 와서 [[서울대학교|서울대]]에도 온 적이 있다. 논문지도 받는 학생의 페이퍼를 받으면 어마어마한 분량의 코멘트로 종이를 가득 채워서 돌려 주었다고 한다.(Luc Illusie의 증언) 그로텐디크의 자녀는 Mireille Dufour와 낳은 세 명의 자식 외에도 이후 사회환경운동에 투신하며 같이 동거했던 Justine Skalba와 낳은 한 명의 아들이 있다. 나중에 그 아이가 [[하버드]] 수학과에 진학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어머니를 매우 사랑해서 자신의 학위 논문을 어머니에게 바쳤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1957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사실 기행으로 유명한 만큼 그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뜬소문도 굉장히 많은데, 그 중 하나로 그로텐디크가 [[1990년]] 63세의 나이에 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시골로 돌아가 농부가 되었고 아무도 그의 행적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사실이 아니며, 농사 지으면서도 간헐적으로 친한 선후배 수학자들과 교류하며 잘 지냈다고 한다. 단지 언론인이나 신세대 수학자들이 찾기 어려울 정도로 프라이버시를 강하게 추구했고 동료들 역시 가급적 그의 의지를 존중했기 때문에 미디어에 쉬이 비춰지지 않았을 뿐이다. 음악을 매우 좋아해서 가끔씩 여유시간마다 피아노를 쳤으며 어렸을 적에는 피아니스트나 작가가 되고 싶어했다고 한다. 수학과 피아노 사이에서 진로 갈등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와 교류했던 수학자들의 회고로 미루어보면 그로텐디크의 성격은 매우 직선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인물은 아니었다고 하는데, 때때로 어린아이 같이 순진한 면도 있었다고 한다. 대수기하로 전공을 바꿀 때 대수기하에 관한 지식이 전무해서 많은 부분을 [[장피에르 세르]]에게 질문해서 보충했다. 지식이 의외로 부족하였는지 세르에게 "[[리만 제타 함수]]의 영점이 무한히 많은가?"하고 물어보았었다고 한다. 뮌스터 대학 수학과 명예교수이자 그로텐디크의 전기를 쓴 빈프리트 샤를라우는 2008년 3월 27일 그로텐디크의 80번째 생일을 맞아 《차이트》 지에 그로텐디크를 기념하는 글 [더 높은 차원에서]를 전면에 실었다. 당시 독일 정부 학술연구부 국장은 그 글이 게재된 시기가 [[만우절]]이 있는 주간이라는 걸 예리하게 언급하며 질문했다. '''그런 사람이 진짜 있기는 한 겁니까?''' 어느 수학자가 IHES를 방문했는데 [[도서관]]에 책이 매우 적었다. 그래서 그로텐디크에게 도서관에 책이 왜 이리 없냐고 물었다. 그 말을 들은 그로텐디크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책을 읽지 않습니다. 책을 씁니다."''' 역대 수학자들의 랭킹을 매긴 사이트([[http://fabpedigree.com/james/gmat200.htm]])에서는 9위를 기록했다. 50위 이내의 수학자들 중 21세기까지 생존한 유일무이한 인물이며, 100위권까지 범위를 넓혀도 21세기까지 생존한 인물은 아틀레 셀버그, 장피에르 세르, 마이클 아티야, 이즈라일 겔판트, 존 내시, 천싱선 정도가 있을 뿐이다. [[파일:역대 수학자 순위.png]] [[분류:프랑스의 수학자]][[분류:유대계 프랑스인]][[분류:1928년 출생]][[분류:2014년 사망]][[분류:필즈상 수상자]][[분류:베를린 출신 인물]][[분류:몽펠리에 대학교 출신]][[분류:무국적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